#대한독립전쟁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박열#영화박열#대한독립만세🇰🇷 1924년 23살의 박열 열사가 '천황암살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장에서 재판관에게 요구하길. 
첫째, 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선 것이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온 것이라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왕의(사모관대)를 착용케 해줄 것이며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이며 
셋째, 법정용어는 절대 조선말만 사용하겠으며 
넷째, 피고의 좌석을 재판관과 동등하게 높여줄 것을 요구하노라

흑도회를 결성해 활동한 독립운동가. 고향 문경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던 박열은 도쿄에 건너가 반제국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고,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불령사를 창립하여 항일활동에 매진했지만 간토 대지진 당시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장기간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민단 초대 단장으로 활동하다 귀국했지만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었다.(자료참조:박열의사기념관,다음백과)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박열#영화박열#대한독립만세🇰🇷 1924년 23살의 박열 열사가 '천황암살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장에서 재판관에게 요구하길.
첫째, 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선 것이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온 것이라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왕의(사모관대)를 착용케 해줄 것이며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이며
셋째, 법정용어는 절대 조선말만 사용하겠으며
넷째, 피고의 좌석을 재판관과 동등하게 높여줄 것을 요구하노라

흑도회를 결성해 활동한 독립운동가. 고향 문경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던 박열은 도쿄에 건너가 반제국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고,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불령사를 창립하여 항일활동에 매진했지만 간토 대지진 당시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장기간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민단 초대 단장으로 활동하다 귀국했지만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었다.(자료참조:박열의사기념관,다음백과)
#historytoday#오늘의역사#1944년1월16일#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이육사#저항시인#광야#청포도#대한독립만세🇰🇷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인 264를 따서 호를 ‘이육사’라고 지었다.(본명 이원록 또는 이원삼)

이육사 시인은 '저항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작아 보일 정도로 평생을 정말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이미 20대 초반 무렵무터 각종 독립 운동에 연관되어 감옥살이를 했으며, 만주까지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 반입 계획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흔 남짓한 짧은 인생이었지만 위대하게 불타오른 애국지사의 표상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애국,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라고 할 수 있다. 40여년의 인생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일제 강점기에 변절을 했던 문인들이 독립 이후 온갖 문화 권력을 누리며 살아간 것을 생각하면....
1943년 육사는 국내의 항일 조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국내에 무기 반입을 시도했다. 그러던 1943년 7월에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검거되어 생을 마쳤다. 1944년 1월 16일 북경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눈을 감지 못한 채 순국하였다.

이육사의 시는 독립운동 지사로서의 강한 의지를 담은 시들이 많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느끼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시들도 존재한다. 대표 시로는 <황혼>, <절정>, <광야>, <청포도>, <꽃>, <교목>이 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자료참조:나무위키,상북누리)
#historytoday#오늘의역사#1944년1월16일#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이육사#저항시인#광야#청포도#대한독립만세🇰🇷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인 264를 따서 호를 ‘이육사’라고 지었다.(본명 이원록 또는 이원삼)

이육사 시인은 '저항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작아 보일 정도로 평생을 정말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이미 20대 초반 무렵무터 각종 독립 운동에 연관되어 감옥살이를 했으며, 만주까지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 반입 계획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흔 남짓한 짧은 인생이었지만 위대하게 불타오른 애국지사의 표상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애국,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라고 할 수 있다. 40여년의 인생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일제 강점기에 변절을 했던 문인들이 독립 이후 온갖 문화 권력을 누리며 살아간 것을 생각하면....
1943년 육사는 국내의 항일 조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국내에 무기 반입을 시도했다. 그러던 1943년 7월에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검거되어 생을 마쳤다. 1944년 1월 16일 북경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눈을 감지 못한 채 순국하였다.

이육사의 시는 독립운동 지사로서의 강한 의지를 담은 시들이 많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느끼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시들도 존재한다. 대표 시로는 <황혼>, <절정>, <광야>, <청포도>, <꽃>, <교목>이 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자료참조:나무위키,상북누리)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한국광복군총사령관#지정천장군#1월15일#서거#대한독립만세🇰🇷 "조국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신흥무관학교 개교식에서

독립된 조국의 품에서 눈을 감기까지 평생을 조국광복의 일념으로 생활한 참군인! 지정천 장군!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하고
-의용군총사령관으로 중국 동삼성 각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연합군과 함께 눈부신 활약을 펼쳤으며
-조국이 해방었지만 이승만정권의 방해와 미군정의 홀대 속에 독립군사령관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대한청년단 조직과 조국재건에 힘쓰시다 1957년1월15일 향년 70세로 서거하셨다.
-운명하기까지도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며 독립을 위해 산화한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장군의 생애는 오직 민족에 대한 사랑과 충정으로 일관되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참조:국가보훈처)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한국광복군총사령관#지정천장군#1월15일#서거#대한독립만세🇰🇷 "조국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신흥무관학교 개교식에서

독립된 조국의 품에서 눈을 감기까지 평생을 조국광복의 일념으로 생활한 참군인! 지정천 장군!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하고
-의용군총사령관으로 중국 동삼성 각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연합군과 함께 눈부신 활약을 펼쳤으며
-조국이 해방었지만 이승만정권의 방해와 미군정의 홀대 속에 독립군사령관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대한청년단 조직과 조국재건에 힘쓰시다 1957년1월15일 향년 70세로 서거하셨다.
-운명하기까지도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며 독립을 위해 산화한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장군의 생애는 오직 민족에 대한 사랑과 충정으로 일관되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참조:국가보훈처)
#historytoday#오늘의역사#1932년1월8일#대한독립전쟁#이봉창의사#백범김구#한인애국단#대한독립만세🇰🇷#잊지않겠습니다#315독립항쟁#임시정부수립#100주년.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이봉창 의사 김구선생만남에서

1932년 1월 8일은 항일애국지사 중 한명인 이봉창 의사(1901~1932)가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진 날입니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봉창 의사와 김구 선생은 여러 번 비밀리에 면담을 가졌고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일왕 폭살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1년에 걸쳐 거사를 준비한 이 의사는 1931년 12월 17일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동 경로를 파악하였습니다. 그리고 계획대로 관병식을 끝내고 돌아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마차가 뒤집어 졌지만 불행히도 히로히토를 명중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토요다마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그해 9월 30일 도쿄 대법원에서 히로히토 저격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0월 10일 순국하였습니다. 
이봉창 의사 일왕 폭살계획은 실패했지만, 이 의사의 거사로 인해 많은 이들의 독립 의지와 투지가 불타오르며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도 활력이 더해졌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하였고, 이봉창 의사의 숭고한 희생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 후 일제는 중국이 이봉창 의사의 거사를 기사화한 것에 대해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고, 상하이 사변 승리 기념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기념식 행사일은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이처럼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은 후일에 많은 영향을 주고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진출처-한국사 지식 캠페인-서경덕교수)
#historytoday#오늘의역사#1932년1월8일#대한독립전쟁#이봉창의사#백범김구#한인애국단#대한독립만세🇰🇷#잊지않겠습니다#315독립항쟁#임시정부수립#100주년.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이봉창 의사 김구선생만남에서

1932년 1월 8일은 항일애국지사 중 한명인 이봉창 의사(1901~1932)가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진 날입니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봉창 의사와 김구 선생은 여러 번 비밀리에 면담을 가졌고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일왕 폭살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1년에 걸쳐 거사를 준비한 이 의사는 1931년 12월 17일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동 경로를 파악하였습니다. 그리고 계획대로 관병식을 끝내고 돌아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마차가 뒤집어 졌지만 불행히도 히로히토를 명중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토요다마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그해 9월 30일 도쿄 대법원에서 히로히토 저격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0월 10일 순국하였습니다.
이봉창 의사 일왕 폭살계획은 실패했지만, 이 의사의 거사로 인해 많은 이들의 독립 의지와 투지가 불타오르며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도 활력이 더해졌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하였고, 이봉창 의사의 숭고한 희생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 후 일제는 중국이 이봉창 의사의 거사를 기사화한 것에 대해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고, 상하이 사변 승리 기념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기념식 행사일은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이처럼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은 후일에 많은 영향을 주고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진출처-한국사 지식 캠페인-서경덕교수)
#historytoday#오늘의우리역사#대한독립전쟁#왈우강우규의사#1920년11월29일#순국#99주년#민족교육자#독립운동가#대한독립만세#잊지않겠습니다 강우규 의사는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한의사이며, 일제 강점기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왈우(曰愚), 자는 찬구(燦九) 본관은 진주이다. 
평안북도 덕천에서 태어나 1884년 함경남도로 이주하였고, 이후 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약방을 차리면서 한의사로 지내며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1911년 을사조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세력들과 연계하여 조선의 독립을 의논했고 4년 후 랴오허현으로 이사하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1915년 요동의 라오허현(饒河縣)으로 옮겨가 거주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하였으며, 요하 주변의 농토를 개간하여 한인촌인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다. 1917년 지린성 동화현에 광동중학교를 세워 동포 교육에 전력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광동중학교와 신흥촌을 다른 한인 교포에게 인계한 뒤 그는 국내에 잠입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가입해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 지린성 지부장이 되어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해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허형과 함께 원산부를 거쳐서 경성부에 잠입했다.

1919년 9월 2일 내외 정세와 총독의 동정을 살피던 중 하세가와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것을 알고, 사이토의 내한 당일 현재의 서울역인 남대문역에서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를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이 빗나가 사이토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대신 사이토를 호위하던 일본인 경찰을 비롯하여 사상자 37명이 나왔다.

그는 현장에서는 몸을 피했으며 거사 뒤 현장에서 빠져 나와 오태영의 소개로 장익규, 임승화 등의 집에서 도피생활을 하다 총독부 고등계 형사인 김태석에게 붙잡혀 9월 17일 수감되었다. 이후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총독 암살미수 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 구형,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체포 되어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하기까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항상 당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후 유해는 감옥 공동묘지에 있다가 해방 이후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 되었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자료제공 강우규의사 기념사업회)
#historytoday#오늘의우리역사#대한독립전쟁#왈우강우규의사#1920년11월29일#순국#99주년#민족교육자#독립운동가#대한독립만세#잊지않겠습니다 강우규 의사는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한의사이며, 일제 강점기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왈우(曰愚), 자는 찬구(燦九) 본관은 진주이다.
평안북도 덕천에서 태어나 1884년 함경남도로 이주하였고, 이후 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약방을 차리면서 한의사로 지내며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1911년 을사조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세력들과 연계하여 조선의 독립을 의논했고 4년 후 랴오허현으로 이사하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1915년 요동의 라오허현(饒河縣)으로 옮겨가 거주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하였으며, 요하 주변의 농토를 개간하여 한인촌인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다. 1917년 지린성 동화현에 광동중학교를 세워 동포 교육에 전력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광동중학교와 신흥촌을 다른 한인 교포에게 인계한 뒤 그는 국내에 잠입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가입해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 지린성 지부장이 되어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해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허형과 함께 원산부를 거쳐서 경성부에 잠입했다.

1919년 9월 2일 내외 정세와 총독의 동정을 살피던 중 하세가와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것을 알고, 사이토의 내한 당일 현재의 서울역인 남대문역에서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를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이 빗나가 사이토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대신 사이토를 호위하던 일본인 경찰을 비롯하여 사상자 37명이 나왔다.

그는 현장에서는 몸을 피했으며 거사 뒤 현장에서 빠져 나와 오태영의 소개로 장익규, 임승화 등의 집에서 도피생활을 하다 총독부 고등계 형사인 김태석에게 붙잡혀 9월 17일 수감되었다. 이후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총독 암살미수 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 구형,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체포 되어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하기까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항상 당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후 유해는 감옥 공동묘지에 있다가 해방 이후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 되었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자료제공 강우규의사 기념사업회)
#오늘의역사#todayhistory#대한독립전쟁#김익상#의사#1921년9월12일#조선총독부#사이토총독#암살시도#대한독립만세🇰🇷#기억합니다  김익상 선생(金益相, 1895년 ~ 1943년 6월 6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직에 종사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광성연초공사에서 일하던 중 1920년 펑톈(奉天)지점으로 전근갔으나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일본기관의 파괴, 요인 암살이 곧 조국독립의 첩경이라는 설명을 듣고,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할 것을 결심하였다.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1921년 9월 12일 건물수리공을 가장하여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비서실에 폭탄을 던진 후 다시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3월 28일 중국 시찰차 들어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고자 상하이 세관부두에서 오성륜·이종암(李鍾岩) 등과 함께 권총으로 사격하고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여 체포되었다(오성륜은 4월 1일 탈옥함). 일본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20년 징역으로 다시 감형되어 1943년 출소, 귀국하였으나 또 다시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음으로 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오늘의역사#todayhistory#대한독립전쟁#김익상#의사#1921년9월12일#조선총독부#사이토총독#암살시도#대한독립만세🇰🇷#기억합니다 김익상 선생(金益相, 1895년 ~ 1943년 6월 6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직에 종사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광성연초공사에서 일하던 중 1920년 펑톈(奉天)지점으로 전근갔으나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일본기관의 파괴, 요인 암살이 곧 조국독립의 첩경이라는 설명을 듣고,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할 것을 결심하였다.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1921년 9월 12일 건물수리공을 가장하여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비서실에 폭탄을 던진 후 다시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3월 28일 중국 시찰차 들어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고자 상하이 세관부두에서 오성륜·이종암(李鍾岩) 등과 함께 권총으로 사격하고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여 체포되었다(오성륜은 4월 1일 탈옥함). 일본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20년 징역으로 다시 감형되어 1943년 출소, 귀국하였으나 또 다시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음으로 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오늘의역사#todayhistory#대한독립전쟁#독립유공자#허위#박찬익#계명우#후손#대한민국#국적증서수여식#독립운동예우#대한독립만세🇰🇷 법무부는 제73주년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대회의실에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국적 증서 수여식을 열었다.
항일 의병을 조직한 허위(1854∼1908) 선생과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박찬익(1884∼1949) 선생, 민족교육에 힘쓴 계봉우(1880∼1959) 선생 등 독립유공자 10명의 후손 31명이 한국 국적을 얻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국적법에 따라 직계존속 등이 독립유공으로 한국 정부의 훈장·포장 등을 받은 사실이 있어 특별귀화 허가를 받게 됐다.
법무부는 2006년부터 해마다 강제이주 등으로 타국에서 살아온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아 국적증서를 수여해왔다. 현재까지 1천78명의 독립유공자 후손이 대한민국 국적을 얻었다.
#오늘의역사#todayhistory#대한독립전쟁#독립유공자#허위#박찬익#계명우#후손#대한민국#국적증서수여식#독립운동예우#대한독립만세🇰🇷 법무부는 제73주년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대회의실에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국적 증서 수여식을 열었다.
항일 의병을 조직한 허위(1854∼1908) 선생과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박찬익(1884∼1949) 선생, 민족교육에 힘쓴 계봉우(1880∼1959) 선생 등 독립유공자 10명의 후손 31명이 한국 국적을 얻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국적법에 따라 직계존속 등이 독립유공으로 한국 정부의 훈장·포장 등을 받은 사실이 있어 특별귀화 허가를 받게 됐다.
법무부는 2006년부터 해마다 강제이주 등으로 타국에서 살아온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아 국적증서를 수여해왔다. 현재까지 1천78명의 독립유공자 후손이 대한민국 국적을 얻었다.
from @hong_seong_ho_ -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의병장#독립투사#교육가#독립운동가#안중근의사#2월14일#기억합시다#국적불명의발렌타인데이#대한독립만세🇰🇷. “위대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순흥, 자는 응칠, 세례명은 토마스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1906년부터 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9년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회담을 마친 뒤 환영군중 쪽으로 갈 때 권총 3발을 쏘아 사살했고, '대한만세'를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언도받아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선생의 나이 32세 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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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의병장#독립투사#교육가#독립운동가#안중근의사#2월14일#기억합시다#국적불명의발렌타인데이#대한독립만세🇰🇷. “위대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순흥, 자는 응칠, 세례명은 토마스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1906년부터 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9년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회담을 마친 뒤 환영군중 쪽으로 갈 때 권총 3발을 쏘아 사살했고, '대한만세'를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언도받아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선생의 나이 32세 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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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today#오늘의역사#독립운동#독립운동가#대한독립전쟁#이장녕#청산리대첩#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군단_참모총장#대한독립만세🇰🇷 1932년1월24일 오늘은 독립군 양성과 항일무정투쟁에 공헌한 이장녕장군님께서 가족과 함께 서거하신 날입니다. -1881년 충남 천안군 목천면 남화리 태생
-결단력이 유달리 강한 유년시절을 보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3기생 졸업
-1903년 육군분위 승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중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 강제 해산되자 가족과 함께 중국 삼원보로 망명 이상룡, 김동삼 등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노력
-신흥강습소 창설, 교관으로 애국청년들의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고취
-1919년 군정부 참모장 임명 후 군정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기관으로 지위를 갖추고 북로 군정서 개칭 및 참모장으로 체계적인 부대편성에 공헌 “북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전투력 증강 및 일본군과 전면전 준비”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 -체코군으로부터 최신무기 구입하여 전투력 강화 “청산리대첩의 대승 후 대한독립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
-1920년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온 일본을을 궤멸시킨 청산리대첩에서 참모장으로 활약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군 주도아래 대한독립군 등 10개 독립군 단체,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 참모총장으로 임명후 자유시로 이동 “자유시 참변으로 다시 중국 동북지방으로 돌아와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나...”
-1921년 일본의 간괴와 소련의 배신으로 독립군이 자유시에 큰 피해를 입어 선생은 중국 동북지방으로 피신
-1925년 북로군정서 출신 중심 신민부 조직되자 참의에 선임하여 활동
-1930년 지정천, 홍진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하여 감찰위원장에 임명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 전개
-1932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에게 가족과 함께 피살됨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참조: 국가보훈처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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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today#오늘의역사#독립운동#독립운동가#대한독립전쟁#이장녕#청산리대첩#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군단_참모총장#대한독립만세🇰🇷 1932년1월24일 오늘은 독립군 양성과 항일무정투쟁에 공헌한 이장녕장군님께서 가족과 함께 서거하신 날입니다. -1881년 충남 천안군 목천면 남화리 태생
-결단력이 유달리 강한 유년시절을 보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3기생 졸업
-1903년 육군분위 승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중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 강제 해산되자 가족과 함께 중국 삼원보로 망명 이상룡, 김동삼 등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노력
-신흥강습소 창설, 교관으로 애국청년들의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고취
-1919년 군정부 참모장 임명 후 군정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기관으로 지위를 갖추고 북로 군정서 개칭 및 참모장으로 체계적인 부대편성에 공헌 “북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전투력 증강 및 일본군과 전면전 준비”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 -체코군으로부터 최신무기 구입하여 전투력 강화 “청산리대첩의 대승 후 대한독립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
-1920년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온 일본을을 궤멸시킨 청산리대첩에서 참모장으로 활약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군 주도아래 대한독립군 등 10개 독립군 단체,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 참모총장으로 임명후 자유시로 이동 “자유시 참변으로 다시 중국 동북지방으로 돌아와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나...”
-1921년 일본의 간괴와 소련의 배신으로 독립군이 자유시에 큰 피해를 입어 선생은 중국 동북지방으로 피신
-1925년 북로군정서 출신 중심 신민부 조직되자 참의에 선임하여 활동
-1930년 지정천, 홍진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하여 감찰위원장에 임명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 전개
-1932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에게 가족과 함께 피살됨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참조: 국가보훈처 네이버캐스트)
#historytoday#오늘의역사#독립운동#독립운동가#대한독립전쟁#이의준#독립투사#독립군#대한독립만세🇰🇷 1929년1월25일 오늘은 불굴의 의지와 활약을 하신 독립투쟁의 최전방의 당당한 군인 이의준 소대장이 순국하신 날입니다. 선생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으나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 당시 재판장이 선생을 부르자, “언권의 자유를 주지 않으면 공술을 거절한다고 강경히 주장하던 육척 장신에 검은 얼굴의 선생이 나서자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앉은 방청석에서는 삼국지에서 본 장비(張飛)와 같다고 속삭였다”고 하는 기사가 선생에 대한 인상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로 볼 때 선생은 매우 건장한 체격에 의지가 굳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무골이요 불요불굴의 독립군 용사로 생각된다.

이의준 열사는 일명 병준(秉俊)·한권웅(韓權雄). 1922년 8월 김창균(金昌均)과 같이 만주에 건너가 참의부(參議府)에 가입했다. 김창균 등과 함께 평안북도 강계에 출동하여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1923년에는 청풍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1명을 사살하고 건물을 불태웠다. 
같은 해 4월에는 우체부를 습격하여 현금 1,500원을 빼앗고 우편물을 소각했으며 신의주와 강계 사이의 전선을 절단하여 일본경찰들의 통신을 차단했다. 
6월에는 백운기(白雲起)·김석홍(金錫弘)·박제환(朴濟煥)·이선택(李善澤) 등과 같이 강계 방면에 출동하여 어뢰면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2명을 사살했다. 
8월에는 강계경찰서 청풍출장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1명을 사살하고 건물을 방화했다.
 1924년 5월 한만국경 지대를 순찰하기 위해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춘화(李春和)·김창균 등 10여 명의 대원들과 함께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 마사탄 강변에 매복하여 중강진에서 배편으로 오는 사이토 일행을 기다렸다. 5월 19일 사이토 일행이 탄 배를 발견하고 사격을 가했으나 기관조수 1명을 부상시키는 데 그쳤다. 
같은 해 7월 김창균과 같이 친일주구 한일룡(韓一龍)과 장갈성(張渴成)을 처형했으며, 
1925년 강계에 출동하여 강계경찰대와 교전했다. 1926년말 만주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8년 4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이듬해 순국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historytoday#오늘의역사#독립운동#독립운동가#대한독립전쟁#이의준#독립투사#독립군#대한독립만세🇰🇷 1929년1월25일 오늘은 불굴의 의지와 활약을 하신 독립투쟁의 최전방의 당당한 군인 이의준 소대장이 순국하신 날입니다. 선생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으나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 당시 재판장이 선생을 부르자, “언권의 자유를 주지 않으면 공술을 거절한다고 강경히 주장하던 육척 장신에 검은 얼굴의 선생이 나서자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앉은 방청석에서는 삼국지에서 본 장비(張飛)와 같다고 속삭였다”고 하는 기사가 선생에 대한 인상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로 볼 때 선생은 매우 건장한 체격에 의지가 굳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무골이요 불요불굴의 독립군 용사로 생각된다.

이의준 열사는 일명 병준(秉俊)·한권웅(韓權雄). 1922년 8월 김창균(金昌均)과 같이 만주에 건너가 참의부(參議府)에 가입했다. 김창균 등과 함께 평안북도 강계에 출동하여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1923년에는 청풍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1명을 사살하고 건물을 불태웠다.
같은 해 4월에는 우체부를 습격하여 현금 1,500원을 빼앗고 우편물을 소각했으며 신의주와 강계 사이의 전선을 절단하여 일본경찰들의 통신을 차단했다.
6월에는 백운기(白雲起)·김석홍(金錫弘)·박제환(朴濟煥)·이선택(李善澤) 등과 같이 강계 방면에 출동하여 어뢰면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2명을 사살했다.
8월에는 강계경찰서 청풍출장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1명을 사살하고 건물을 방화했다.
1924년 5월 한만국경 지대를 순찰하기 위해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춘화(李春和)·김창균 등 10여 명의 대원들과 함께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 마사탄 강변에 매복하여 중강진에서 배편으로 오는 사이토 일행을 기다렸다. 5월 19일 사이토 일행이 탄 배를 발견하고 사격을 가했으나 기관조수 1명을 부상시키는 데 그쳤다.
같은 해 7월 김창균과 같이 친일주구 한일룡(韓一龍)과 장갈성(張渴成)을 처형했으며,
1925년 강계에 출동하여 강계경찰대와 교전했다. 1926년말 만주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8년 4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이듬해 순국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historytoday#오늘의역사#독립운동#독립운동가#대한독립전쟁#이장녕#청산리대첩#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군단_참모총장#대한독립만세🇰🇷 1932년1월24일 오늘은 독립군 양성과 항일무정투쟁에 공헌한 이장녕장군님께서 가족과 함께 서거하신 날입니다. -1881년 충남 천안군 목천면 남화리 태생
-결단력이 유달리 강한 유년시절을 보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3기생 졸업
-1903년 육군분위 승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중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 강제 해산되자 가족과 함께 중국 삼원보로 망명 이상룡, 김동삼 등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노력
-신흥강습소 창설, 교관으로 애국청년들의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고취
-1919년 군정부 참모장 임명 후 군정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기관으로 지위를 갖추고 북로 군정서 개칭 및 참모장으로 체계적인 부대편성에 공헌 “북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전투력 증강 및 일본군과 전면전 준비”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 -체코군으로부터 최신무기 구입하여 전투력 강화 “청산리대첩의 대승 후 대한독립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
-1920년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온 일본을을 궤멸시킨 청산리대첩에서 참모장으로 활약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군 주도아래 대한독립군 등 10개 독립군 단체,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 참모총장으로 임명후 자유시로 이동 “자유시 참변으로 다시 중국 동북지방으로 돌아와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나...”
-1921년 일본의 간괴와 소련의 배신으로 독립군이 자유시에 큰 피해를 입어 선생은 중국 동북지방으로 피신
-1925년 북로군정서 출신 중심 신민부 조직되자 참의에 선임하여 활동
-1930년 지정천, 홍진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하여 감찰위원장에 임명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 전개
-1932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에게 가족과 함께 피살됨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참조: 국가보훈처 네이버캐스트)
#historytoday#오늘의역사#독립운동#독립운동가#대한독립전쟁#이장녕#청산리대첩#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군단_참모총장#대한독립만세🇰🇷 1932년1월24일 오늘은 독립군 양성과 항일무정투쟁에 공헌한 이장녕장군님께서 가족과 함께 서거하신 날입니다. -1881년 충남 천안군 목천면 남화리 태생
-결단력이 유달리 강한 유년시절을 보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3기생 졸업
-1903년 육군분위 승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중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 강제 해산되자 가족과 함께 중국 삼원보로 망명 이상룡, 김동삼 등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노력
-신흥강습소 창설, 교관으로 애국청년들의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고취
-1919년 군정부 참모장 임명 후 군정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기관으로 지위를 갖추고 북로 군정서 개칭 및 참모장으로 체계적인 부대편성에 공헌 “북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전투력 증강 및 일본군과 전면전 준비”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 -체코군으로부터 최신무기 구입하여 전투력 강화 “청산리대첩의 대승 후 대한독립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
-1920년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온 일본을을 궤멸시킨 청산리대첩에서 참모장으로 활약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군 주도아래 대한독립군 등 10개 독립군 단체,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 참모총장으로 임명후 자유시로 이동 “자유시 참변으로 다시 중국 동북지방으로 돌아와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나...”
-1921년 일본의 간괴와 소련의 배신으로 독립군이 자유시에 큰 피해를 입어 선생은 중국 동북지방으로 피신
-1925년 북로군정서 출신 중심 신민부 조직되자 참의에 선임하여 활동
-1930년 지정천, 홍진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하여 감찰위원장에 임명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 전개
-1932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에게 가족과 함께 피살됨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참조: 국가보훈처 네이버캐스트)
#historytoday#오늘의역사#독립운동#독립운동가#대한독립전쟁#노백린장군#김구#임시정부#참군인#대한민국공군의효시#대한독립만세🇰🇷. 1926년1월22일 오늘은 노백린장군의 서거일입니다. “노백린 장군은 일제강점기 한국‧미국‧중국을 무대로 활약한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군무총장(현재 국방장관)‧참모총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군무총장 시절 독립전쟁을 위해 임시정부의 공식 군사정책으로 미국에 비행학교/비행대를 창설하고 비행학교 교장도 역임, 오늘날 한국 공군의 역사적 법통적 효시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1875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게이오기주쿠대학과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1899년 11월에 일본군 견습사관이 되었고 1900년에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에는 한국의 교육시설이 변변찮아 엘리트를 일본의 사관학교에 보내 공부시켰는데 그탓에 일본에서 일단 임관한 다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재임관했다.

1900년 대한제국군으로 복귀해 보병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에 육군무관학교, 육군연성학교의 교관을 지냈다. 정위(대위)로 근무할 당시에 러일전쟁을 겪었고 관전사란 직책으로 일본군을 따라 종군하였다. 귀국 후에 정령(대령)까지 진급하여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육군연성학교장 등을 지냈다.

당시의 군인들은 일본에서 공부한 친일파가 많았지만 그는 을사늑약과 군대 해산 등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진급에서 제외됐고 1907년에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다. 1907년에 군이 해산되자 육군연성학교장에서 물러나고 국방부 역할이었던 군부의 교육국장으로 배속되었다. 당시 한국군에 남은 부대는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 정도가 고작이었고 이들은 실질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부대가 아닌 의장용 부대였다. 한일합방이 이뤄지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최종계급은 대한제국군 정령(대령)이었다.

퇴역 후에는 교육계몽 운동 등 독립운동을 펼쳤고 김구와 접촉하기도 했고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사업은 당시 돈으로 10만원을 잃는 등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1914년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했고 항공학교를 세웠다. 그 후 하와이에서 국민군단 교관을 지냈다. 그는 구한말의 군인임에도 항공전력의 중요성을 잘 알았기에 계속 공군력을 키우는 걸 강조했다. 이에 따라 노백린은 최용덕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공군의 창건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에 임시정부에 참여해 활동했고 군무총장 등을 지냈다. 당시 임정활동은 극도로 어려웠고 그도 1926년에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녀인 노선경, 노태준, 노순경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62년에 노백린은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historytoday#오늘의역사#독립운동#독립운동가#대한독립전쟁#노백린장군#김구#임시정부#참군인#대한민국공군의효시#대한독립만세🇰🇷. 1926년1월22일 오늘은 노백린장군의 서거일입니다. “노백린 장군은 일제강점기 한국‧미국‧중국을 무대로 활약한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군무총장(현재 국방장관)‧참모총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군무총장 시절 독립전쟁을 위해 임시정부의 공식 군사정책으로 미국에 비행학교/비행대를 창설하고 비행학교 교장도 역임, 오늘날 한국 공군의 역사적 법통적 효시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1875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게이오기주쿠대학과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1899년 11월에 일본군 견습사관이 되었고 1900년에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에는 한국의 교육시설이 변변찮아 엘리트를 일본의 사관학교에 보내 공부시켰는데 그탓에 일본에서 일단 임관한 다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재임관했다.

1900년 대한제국군으로 복귀해 보병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에 육군무관학교, 육군연성학교의 교관을 지냈다. 정위(대위)로 근무할 당시에 러일전쟁을 겪었고 관전사란 직책으로 일본군을 따라 종군하였다. 귀국 후에 정령(대령)까지 진급하여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육군연성학교장 등을 지냈다.

당시의 군인들은 일본에서 공부한 친일파가 많았지만 그는 을사늑약과 군대 해산 등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진급에서 제외됐고 1907년에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다. 1907년에 군이 해산되자 육군연성학교장에서 물러나고 국방부 역할이었던 군부의 교육국장으로 배속되었다. 당시 한국군에 남은 부대는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 정도가 고작이었고 이들은 실질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부대가 아닌 의장용 부대였다. 한일합방이 이뤄지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최종계급은 대한제국군 정령(대령)이었다.

퇴역 후에는 교육계몽 운동 등 독립운동을 펼쳤고 김구와 접촉하기도 했고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사업은 당시 돈으로 10만원을 잃는 등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1914년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했고 항공학교를 세웠다. 그 후 하와이에서 국민군단 교관을 지냈다. 그는 구한말의 군인임에도 항공전력의 중요성을 잘 알았기에 계속 공군력을 키우는 걸 강조했다. 이에 따라 노백린은 최용덕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공군의 창건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에 임시정부에 참여해 활동했고 군무총장 등을 지냈다. 당시 임정활동은 극도로 어려웠고 그도 1926년에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녀인 노선경, 노태준, 노순경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62년에 노백린은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신언준#서거일#민족언론인#대한독립만세🇰🇷 1938년1월20일 오늘은 은암 신언준선생이 서거하신 날입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특히 민족 언론인으로 최선을 다하여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중국과의 이간질을 무력화 시키며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알려 독립운동의 정당성 및 우방의지지를 얻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국민에게 외면받는 많은 언론인들에게 시사하는바가 크신 인물이십니다.” 호는 은암(隱巖). 평안남도 평원 출신.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항저우영문전수학교(杭州英文專修學校) 및 우쑹국립정치대학(吳淞國立政治大學), 둥우대학(東吳大學) 법률과를 졸업하였다.
1924년 대학재학 시절에 상해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를 발기하였다. 이어 1926년에는 상해 한인학우회(韓人學友會)의 집행위원과 후보위원이 되어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27년 상해 흥사단(興士團) 입단 이후로는 줄곧 안창호(安昌浩)와 행동을 같이하면서, 중국어·영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교섭·통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인성학교(仁成學校) 학감을 맡아 독립운동가 자녀의 민족교육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의 『중앙일보(中央日報)』 논설위원과 『세계신문(世界新聞)』 아주부장(亞洲部長)을 보임하면서 언론계와 인연을 맺었고, 1929년에는 『동아일보』 상해·난징(南京)지역 특파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7년간 상해임시정부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국내에 보도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각 신문·잡지에도 독립운동에 관한 논설들을 발표해 중국인의 항일기운을 고취시켰다.
그의 언론활동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것이 1931년 7월에 발생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의 취재보도였다. 그는 이 사건이 한·중 두 민족을 이간시키려는 일제의 간교한 술책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간파, 한인의 중국인 배척운동을 제지시켰다.
나아가 그는 그 뒤 중국정부의 외교부장을 방문하고 중국의 신문기자초대회 등을 개최하는 등 중국의 반일여론 조성에 기여하였다. 또 안창호가 잡힌 뒤에는 김구(金九)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해 1933년 중국군사위원회와 접촉, 한인청년들을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간부훈련단에 입단시키는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는 대문호 노신(魯迅)·채원배(蔡元培) 등을 비롯한 중국의 지사·정치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관계로 임시정부와 중국정부와의 교섭 업무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신병으로 1936년 1월 귀국하였고, 향리에서 투병 끝에 1938년 1월 20일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신언준#서거일#민족언론인#대한독립만세🇰🇷 1938년1월20일 오늘은 은암 신언준선생이 서거하신 날입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특히 민족 언론인으로 최선을 다하여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중국과의 이간질을 무력화 시키며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알려 독립운동의 정당성 및 우방의지지를 얻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국민에게 외면받는 많은 언론인들에게 시사하는바가 크신 인물이십니다.” 호는 은암(隱巖). 평안남도 평원 출신.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항저우영문전수학교(杭州英文專修學校) 및 우쑹국립정치대학(吳淞國立政治大學), 둥우대학(東吳大學) 법률과를 졸업하였다.
1924년 대학재학 시절에 상해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를 발기하였다. 이어 1926년에는 상해 한인학우회(韓人學友會)의 집행위원과 후보위원이 되어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27년 상해 흥사단(興士團) 입단 이후로는 줄곧 안창호(安昌浩)와 행동을 같이하면서, 중국어·영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교섭·통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인성학교(仁成學校) 학감을 맡아 독립운동가 자녀의 민족교육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의 『중앙일보(中央日報)』 논설위원과 『세계신문(世界新聞)』 아주부장(亞洲部長)을 보임하면서 언론계와 인연을 맺었고, 1929년에는 『동아일보』 상해·난징(南京)지역 특파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7년간 상해임시정부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국내에 보도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각 신문·잡지에도 독립운동에 관한 논설들을 발표해 중국인의 항일기운을 고취시켰다.
그의 언론활동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것이 1931년 7월에 발생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의 취재보도였다. 그는 이 사건이 한·중 두 민족을 이간시키려는 일제의 간교한 술책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간파, 한인의 중국인 배척운동을 제지시켰다.
나아가 그는 그 뒤 중국정부의 외교부장을 방문하고 중국의 신문기자초대회 등을 개최하는 등 중국의 반일여론 조성에 기여하였다. 또 안창호가 잡힌 뒤에는 김구(金九)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해 1933년 중국군사위원회와 접촉, 한인청년들을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간부훈련단에 입단시키는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는 대문호 노신(魯迅)·채원배(蔡元培) 등을 비롯한 중국의 지사·정치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관계로 임시정부와 중국정부와의 교섭 업무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신병으로 1936년 1월 귀국하였고, 향리에서 투병 끝에 1938년 1월 20일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박열#영화박열#대한독립만세🇰🇷 1924년 23살의 박열 열사가 '천황암살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장에서 재판관에게 요구하길. 
첫째, 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선 것이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온 것이라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왕의(사모관대)를 착용케 해줄 것이며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이며 
셋째, 법정용어는 절대 조선말만 사용하겠으며 
넷째, 피고의 좌석을 재판관과 동등하게 높여줄 것을 요구하노라

흑도회를 결성해 활동한 독립운동가. 고향 문경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던 박열은 도쿄에 건너가 반제국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고,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불령사를 창립하여 항일활동에 매진했지만 간토 대지진 당시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장기간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민단 초대 단장으로 활동하다 귀국했지만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었다.(자료참조:박열의사기념관,다음백과)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박열#영화박열#대한독립만세🇰🇷 1924년 23살의 박열 열사가 '천황암살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장에서 재판관에게 요구하길.
첫째, 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선 것이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온 것이라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왕의(사모관대)를 착용케 해줄 것이며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이며
셋째, 법정용어는 절대 조선말만 사용하겠으며
넷째, 피고의 좌석을 재판관과 동등하게 높여줄 것을 요구하노라

흑도회를 결성해 활동한 독립운동가. 고향 문경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던 박열은 도쿄에 건너가 반제국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고,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불령사를 창립하여 항일활동에 매진했지만 간토 대지진 당시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장기간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민단 초대 단장으로 활동하다 귀국했지만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었다.(자료참조:박열의사기념관,다음백과)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이육사#저항시인#광야#청포도#대한독립만세🇰🇷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인 264를 따서 호를 ‘이육사’라고 지었다.(본명 이원록 또는 이원삼)

이육사 시인은 '저항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작아 보일 정도로 평생을 정말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이미 20대 초반 무렵무터 각종 독립 운동에 연관되어 감옥살이를 했으며, 만주까지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 반입 계획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흔 남짓한 짧은 인생이었지만 위대하게 불타오른 애국지사의 표상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애국,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라고 할 수 있다. 40여년의 인생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일제 강점기에 변절을 했던 문인들이 독립 이후 온갖 문화 권력을 누리며 살아간 것을 생각하면....
1943년 육사는 국내의 항일 조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국내에 무기 반입을 시도했다. 그러던 1943년 7월에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검거되어 생을 마쳤다. 1944년 1월 16일 북경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눈을 감지 못한 채 순국하였다.

이육사의 시는 독립운동 지사로서의 강한 의지를 담은 시들이 많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느끼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시들도 존재한다. 대표 시로는 <황혼>, <절정>, <광야>, <청포도>, <꽃>, <교목>이 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자료참조:나무위키,상북누리)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이육사#저항시인#광야#청포도#대한독립만세🇰🇷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인 264를 따서 호를 ‘이육사’라고 지었다.(본명 이원록 또는 이원삼)

이육사 시인은 '저항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작아 보일 정도로 평생을 정말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이미 20대 초반 무렵무터 각종 독립 운동에 연관되어 감옥살이를 했으며, 만주까지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 반입 계획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흔 남짓한 짧은 인생이었지만 위대하게 불타오른 애국지사의 표상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애국,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라고 할 수 있다. 40여년의 인생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일제 강점기에 변절을 했던 문인들이 독립 이후 온갖 문화 권력을 누리며 살아간 것을 생각하면....
1943년 육사는 국내의 항일 조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국내에 무기 반입을 시도했다. 그러던 1943년 7월에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검거되어 생을 마쳤다. 1944년 1월 16일 북경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눈을 감지 못한 채 순국하였다.

이육사의 시는 독립운동 지사로서의 강한 의지를 담은 시들이 많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느끼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시들도 존재한다. 대표 시로는 <황혼>, <절정>, <광야>, <청포도>, <꽃>, <교목>이 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자료참조:나무위키,상북누리)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한국광복군총사령관#지정천장군#대한독립만세🇰🇷 "조국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신흥무관학교 개교식에서

독립된 조국의 품에서 눈을 감기까지 평생을 조국광복의 일념으로 생활한 참군인! 지정천 장군!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하고
-의용군총사령관으로 중국 동삼성 각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연합군과 함께 눈부신 활약을 펼쳤으며
-조국이 해방었지만 이승만정권의 방해와 미군정의 홀대 속에 독립군사령관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대한청년단 조직과 조국재건에 힘쓰시다 1957년1월15일 향년 70세로 서거하셨다.
-운명하기까지도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며 독립을 위해 산화한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장군의 생애는 오직 민족에 대한 사랑과 충정으로 일관되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참조:국가보훈처)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한국광복군총사령관#지정천장군#대한독립만세🇰🇷 "조국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신흥무관학교 개교식에서

독립된 조국의 품에서 눈을 감기까지 평생을 조국광복의 일념으로 생활한 참군인! 지정천 장군!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하고
-의용군총사령관으로 중국 동삼성 각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연합군과 함께 눈부신 활약을 펼쳤으며
-조국이 해방었지만 이승만정권의 방해와 미군정의 홀대 속에 독립군사령관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대한청년단 조직과 조국재건에 힘쓰시다 1957년1월15일 향년 70세로 서거하셨다.
-운명하기까지도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며 독립을 위해 산화한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장군의 생애는 오직 민족에 대한 사랑과 충정으로 일관되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참조:국가보훈처)
#historytoday#오늘의역사#1932년1월8일#대한독립전쟁#이봉창의사#백범김구#한인애국단#대한독립만세🇰🇷#잊지않겠습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이봉창 의사 김구선생만남에서

1932년 1월 8일은 항일애국지사 중 한명인 이봉창 의사(1901~1932)가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진 날입니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봉창 의사와 김구 선생은 여러 번 비밀리에 면담을 가졌고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일왕 폭살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1년에 걸쳐 거사를 준비한 이 의사는 1931년 12월 17일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동 경로를 파악하였습니다. 그리고 계획대로 관병식을 끝내고 돌아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마차가 뒤집어 졌지만 불행히도 히로히토를 명중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토요다마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그해 9월 30일 도쿄 대법원에서 히로히토 저격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0월 10일 순국하였습니다. 
이봉창 의사 일왕 폭살계획은 실패했지만, 이 의사의 거사로 인해 많은 이들의 독립 의지와 투지가 불타오르며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도 활력이 더해졌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하였고, 이봉창 의사의 숭고한 희생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 후 일제는 중국이 이봉창 의사의 거사를 기사화한 것에 대해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고, 상하이 사변 승리 기념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기념식 행사일은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이처럼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은 후일에 많은 영향을 주고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진출처-한국사 지식 캠페인-서경덕교수)
#historytoday#오늘의역사#1932년1월8일#대한독립전쟁#이봉창의사#백범김구#한인애국단#대한독립만세🇰🇷#잊지않겠습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이봉창 의사 김구선생만남에서

1932년 1월 8일은 항일애국지사 중 한명인 이봉창 의사(1901~1932)가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진 날입니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봉창 의사와 김구 선생은 여러 번 비밀리에 면담을 가졌고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일왕 폭살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1년에 걸쳐 거사를 준비한 이 의사는 1931년 12월 17일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동 경로를 파악하였습니다. 그리고 계획대로 관병식을 끝내고 돌아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마차가 뒤집어 졌지만 불행히도 히로히토를 명중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토요다마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그해 9월 30일 도쿄 대법원에서 히로히토 저격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0월 10일 순국하였습니다.
이봉창 의사 일왕 폭살계획은 실패했지만, 이 의사의 거사로 인해 많은 이들의 독립 의지와 투지가 불타오르며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도 활력이 더해졌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하였고, 이봉창 의사의 숭고한 희생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 후 일제는 중국이 이봉창 의사의 거사를 기사화한 것에 대해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고, 상하이 사변 승리 기념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기념식 행사일은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이처럼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은 후일에 많은 영향을 주고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진출처-한국사 지식 캠페인-서경덕교수)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의열단#김지섭의사#1924년1월5일#대한독립만세🇰🇷. 김지섭은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투척하여 조선 강점의 원흉들을 폭살할 목적이었으나 제국의회의 휴회로 실행하지 못하게 되자 일본 황성에 폭탄을 던지고 체포되어 일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한 인물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활동에 참여했다. 국내에 있는 일제 기관들을 파괴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다가 일본의 독립운동가 체포를 위한 음모에 빠져 실패했다. 그 후 일본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수천 명의 한인 교포들이 학살당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제국의회에 폭탄테러를 계획했다가 일본 황성에 폭탄을 투척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일본의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자료:다음,경북콘텐츠코리아랩)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의열단#김지섭의사#1924년1월5일#대한독립만세🇰🇷. 김지섭은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투척하여 조선 강점의 원흉들을 폭살할 목적이었으나 제국의회의 휴회로 실행하지 못하게 되자 일본 황성에 폭탄을 던지고 체포되어 일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한 인물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활동에 참여했다. 국내에 있는 일제 기관들을 파괴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다가 일본의 독립운동가 체포를 위한 음모에 빠져 실패했다. 그 후 일본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수천 명의 한인 교포들이 학살당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제국의회에 폭탄테러를 계획했다가 일본 황성에 폭탄을 투척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일본의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자료:다음,경북콘텐츠코리아랩)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김경천장군#백마탄김장군#독립항쟁영웅#1942년1월2일#대한독립만세🇰🇷. 김경천(金擎天)장군은 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김정우의 막내로 태어났다. 김정우는 일본 유학파로 귀국해서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으로 일했다.김경천은 8살 때 서울로 이주했고 15살에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김경천은 17살에 일본육군사관학교 부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이때 한국인이 그 학교에 입학하려면 일본천황한테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19살에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하고 22살에 육군사관학교 전과정을 마쳤다. 졸업성적은 언어상 불리하여 1등을 못했지만 종합적인 성적은 여태까지의 졸업생들을 포함하여 최우등이었다.

재학중에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졸업 후 일본군 장교 임관을 거부하려 했으나 독립전쟁을 위해 일본군에서 정보를 빼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처먹고 임관해 이후 1918년 말까지 기병장교로 복무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기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다가 그해 가을 노령 연해주로 건너갔다. 1919년 ~ 1922년, 연해주에서 마적 및 일본군(이 시기 러시아 내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으며, 일본군은 대규모로 군대를 시베리아 출병을 했을 당시였다.), 러시아 백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설적인 김장군으로 연해주 일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썼기 때문에 김일성 가짜설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그의 활약상과 위상이 당대 어느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뒤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계획이 좌절되어 실의의 날들을 보냈지만 소련 내 한국인들에 대한 교육 등 가능한 독립운동 보조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36년 소련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 체포되었고 1939년에 잠시 석방되었다가 다시 체포되어 8년형을 언도받고 북부 시베리아 수용소로 옮겨져 복역하다가 1942년 1월에 사망했다.

1956년과 1959년에 소련 군사재판소에서 재심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1998년에는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그가 기록한 회고록과 일기형식으로 생애를 기록한 글로 '경천아일록'이 있다. 
KBS 역사스페셜 2012년 12월 06일자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에서 그의 삶을 재조명한 바 있다. (자료 참조: 나무위키) “나라를 지키고 되찾기 위해 한 평생 보장된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난에 찬 항일 독립전쟁의 선봉장이 된 김경천 장군, 일본군 장교로 민족을 배신하고 독재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살아온 자들이 현충원에 묻히고 후손들이 아직도 기득권인 이 나라에서 김경천 장군의 고귀한 정신이 더욱 부끄럽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historytoday#오늘의역사#대한독립전쟁#독립운동#독립운동가 #김경천장군#백마탄김장군#독립항쟁영웅#1942년1월2일#대한독립만세🇰🇷. 김경천(金擎天)장군은 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김정우의 막내로 태어났다. 김정우는 일본 유학파로 귀국해서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으로 일했다.김경천은 8살 때 서울로 이주했고 15살에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김경천은 17살에 일본육군사관학교 부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이때 한국인이 그 학교에 입학하려면 일본천황한테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19살에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하고 22살에 육군사관학교 전과정을 마쳤다. 졸업성적은 언어상 불리하여 1등을 못했지만 종합적인 성적은 여태까지의 졸업생들을 포함하여 최우등이었다.

재학중에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졸업 후 일본군 장교 임관을 거부하려 했으나 독립전쟁을 위해 일본군에서 정보를 빼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처먹고 임관해 이후 1918년 말까지 기병장교로 복무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기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다가 그해 가을 노령 연해주로 건너갔다. 1919년 ~ 1922년, 연해주에서 마적 및 일본군(이 시기 러시아 내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으며, 일본군은 대규모로 군대를 시베리아 출병을 했을 당시였다.), 러시아 백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설적인 김장군으로 연해주 일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썼기 때문에 김일성 가짜설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그의 활약상과 위상이 당대 어느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뒤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계획이 좌절되어 실의의 날들을 보냈지만 소련 내 한국인들에 대한 교육 등 가능한 독립운동 보조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36년 소련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 체포되었고 1939년에 잠시 석방되었다가 다시 체포되어 8년형을 언도받고 북부 시베리아 수용소로 옮겨져 복역하다가 1942년 1월에 사망했다.

1956년과 1959년에 소련 군사재판소에서 재심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1998년에는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그가 기록한 회고록과 일기형식으로 생애를 기록한 글로 '경천아일록'이 있다.
KBS 역사스페셜 2012년 12월 06일자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에서 그의 삶을 재조명한 바 있다. (자료 참조: 나무위키) “나라를 지키고 되찾기 위해 한 평생 보장된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난에 찬 항일 독립전쟁의 선봉장이 된 김경천 장군, 일본군 장교로 민족을 배신하고 독재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살아온 자들이 현충원에 묻히고 후손들이 아직도 기득권인 이 나라에서 김경천 장군의 고귀한 정신이 더욱 부끄럽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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